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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BALCONY Column] 서거 100주기를 맞은 푸치니, 비평가들의 거센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삶 조회수 64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4-03-28 11:00:00






 

 

[BALCONY Column] 서거 100주기를 맞은 푸치니, 비평가들의 거센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삶
Club BALCONY 매거진 111호 (2024년 1~3월호) 中

글/유윤종 동아일보 문화 전문기자_ 28년째 중단과 복귀를 반복하며 일간지 음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극 I형 인간이지만 음악 얘기를 나누는 일은 마다하지 않는다. '매혹되며 살기'가 가장 중요한 목표다.


2024년은 이탈리아 오페라 거장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서거 100주기가 되는 해다. 모차르트, 베르디와 함께 세계 오페라 프로덕션의 대략 4분의 1씩을(나머지는 다른 작곡가들의 총합) 나눠 가지는 푸치니는 경력 초반부터 ‘베르디의 후계자’로 선정됐고, 그의 ‘3부작 일 트리티코(Il Trittico)’를 한 작품으로 볼 때 오페라 10편을 썼으며, 대부분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린 행운아로 치부된다. 과연 그랬던가?
그것만이 사실의 전부는 아니다. 푸치니는 오페라 경력 대부분에 걸쳐 적대적인 비평가들 때로는 적대적인 청중들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그의 작품 목록은 자신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도전들에 대한 치열한 응전의 결과였다.


 

 

베르디의 계보를 잇기 위해 기획된 작곡가

  ‘베르디 후계자’ 푸치니의 탄생은 기획의 산물이었다. 1880년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비평가와 작곡가, 대본 작가와 지휘자들의 모임 ‘스카필리아투라’(머리 헝클어진 자들)는 독일과 프랑스의 ‘선진’ 예술에서 이탈리아 예술의 활력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1883년 밀라노 음악원을 졸업한 젊은 작곡가 푸치니의 작품들이었다. 푸치니가 쓴 첫 오페라 <빌리>(1884)는 초연 전 스카필리아투라 그룹을 앞에 둔 시연회에서 이탈리아 최고 악보 출판사이자 오페라 흥행사인 ‘카사 리코르디’의 실질적 경영자 줄리오 리코르디의 눈길을 끌었다.

  리코르디는 자사 소속으로 연로해진 베르디가 <아이다>(1871) 이후 <오텔로>(1887)까지 15년 이상이나 새 작품을 내놓지 않으면서 회사의 수입과 영향력이 감소하는 데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유망한 신예를 발견한 리코르디는 푸치니를 자사 소속으로 영입하고 이 ‘베르디 후계자’의 대대적 홍보에 나섰다. 푸치니는 세 번째 오페라 <마농 레스코>(1893)의 성공으로 리코르디의 기대에 보답하게 된다.

  푸치니에 대한 견제의 시선은 그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네 번째 오페라 <라 보엠>(1896)부터 명확히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일간지와 음악 전문지들은 “너무 가볍다.” “증오나 질투와 같은 강력한 감정이 결여됐다.” “디테일은 세련됐지만 통일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내놓았다. 특히 “남성적인 베르디 오페라와 비교할 때 너무 연약하고 가볍다, 여성적이다.”라는 비판이 많았다. 대부분 전작 <마농 레스코>부터 계속돼 온 비판이었다.

  당시 푸치니는 선배 음악가들에게 없던 환경과 마주하고 있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과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오페라 극장을 채울 중산층의 부는 급격히 증대했다. 밀라노에서만 1,000명 이상의 프로 성악가들이 활동했다.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찾는 수요를 따라 저널리즘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다음 작품인 <토스카>(1900)에서 푸치니는 변화의 기회를 잡았다. 이 해 교황청이 로마에 선포한 ‘희년’(禧年, Jubilee)을 맞아 리코르디가 강권한 소재였다. 푸치니 자신은 ‘내게 맞지 않는 극’이라고 불평했다. 여주인공이 오랜 기다림 끝에 가냘프게 죽어 가는 전작들과 달리 토스카에는 당대 베리스모(사실주의) 오페라들에 상응하는 폭력과 증오가 있었다.

  초연의 미지근한 반응을 지나 이내 열광적 팬들을 확보한 이 작품에 대해서도 평론가들은 비판의 날을 세웠다. 루이지 토르키라는 평론가는 “토스카는 젊은 작곡가들의 나쁜 경향을 함축한다. 노래보다 소음, 낭송, 고함이 많다. 이런 강한 주제는 푸치니에게 맞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더 나쁜 조짐은 이 작품에서부터 푸치니가 ‘비(非) 이탈리아적’이라는 비판이 커졌다는 점이었다. 미켈레 비르질리오라는 평론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데카당스’라는 논문에서 <토스카>가 당대 외국(주로 프랑스)의 세기말적이고 퇴행적인 경향을 대표한다고 질타했다.

  베르디와의 비교도 계속됐다. 빈첸초 모렐로는 “베르디는 남성적인 음악을 쓸 줄 알았고 푸치니보다 더 심오한 것을 추구했다.”며 푸치니를 질책했다. 푸치니를 둘러싼 적대적인 시선은 <나비부인>(1904)의 밀라노 라 스칼라 초연 무대에서 그 첫 번째 정점을 찍었다. 무대는 야유로 뒤덮였고 주연 여가수는 오케스트라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자 울음을 터뜨렸다. 신문에는 ‘완벽한 소란을 피우는 데 성공한 청중들은 양 떼처럼 만족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는 후기가 실렸다.



작가주의와 대중주의 사이의 산물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나 지금이나 라 스칼라의 청중들은 까칠하기로 유명하다. ‘이 잘나가는 자를 한 번은 쓰러뜨리자’는데 그날 저녁의 분위기가 모였을 수 있다. 리코르디의 라이벌인 손초뇨사의 ‘공작’에 의한 소란이라는 설도 제기된다. 어쨌거나 관객들의 적대적 분위기를 만끽한 기자들은 바로 사냥에 나섰다. “라보엠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 데다 덜 신선하고 선율도 덜 매력적이다.” “푸치니는 자기 자신을 반복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공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푸치니의 작품은 이 시대 여성화된 사회의 거울 이미지다.”

  이제 푸치니를 향한 검과 창의 방향은 명확했다. 명확하면서도 서로 상반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나는 푸치니가 “지나치게 해외 경향을 의식하고 이탈리아의 선배들, 특히 베르디의 남성적 전통을 잃은 채 병약한 여성성에 몰두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자기 표절을 반복하고 당대의 최신 예술 조류를 소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비판은 1910년 파우스토 토레프랑카라는 평론가의 『푸치니와 국제적 예술』이라는 책이 나옴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 책에서 토레프랑카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나약함과 병약함, 지성의 부족, 독창성 부족’으로 요약하면서 “푸치니의 작품은 세기말의 온갖 유해성, 지적 퇴보, 특히 여성적인 유약함을 상징한다.”고 질타했다. 한정된 지식인 사회에서만 읽힌 팸플릿 수준의 소책자였지만 파장은 컸다. 푸치니의 상처 역시 컸고 공적으로 반박을 표하고 싶어 했지만 “일을 키우지 말자.”는 리코르디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토레프랑카가 없었어도 <나비부인> 초연의 소란을 본 푸치니는 ‘변화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191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연된 <서부의 아가씨>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극 초반 주역들의 ‘등장의 아리아’와 2중창에는 눈에 띄게 녹아 흐르는 듯한 선율이 없다. 대신 캘리포니아의 대자연과 눈보라를 연상시키는 두툼한 관현악이 극을 지배한다. 이 오페라 역시 이탈리아인들의 환영을 받기는 힘들었다. “바그너와 북미 영화, 빈 오페레타의 짬뽕이다.” “진정한 푸치니, 마농 레스코와 라보엠과 나비부인의 푸치니는 여기 없다.”

  이제 푸치니는 기존의 두 가지 비판에 더해 “예전의 푸치니와 다르다.”는 힐난까지, 모두 세 가지 비판과 직면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세상은 급격히 과거와 단절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유럽을 강타했다. 이 시기 푸치니는 적국이 된 오스트리아에서 ‘오페레타 스타일’로 의뢰받은 <제비(La Rondine)>(1917)를 쓰는 데 시간을 보냈다.



‘우리 시대 음악’의 세계는 과연 건강한가?

  다음 작품은 포연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럽을 피해 다시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선을 보인 ‘3부작’(1918)이었다. 푸치니가 이 작품에서 선보인 전략은 면밀하면서도 참신해 보였다. 성격이 다른 세 단막 오페라를 하룻밤에 선보일 수 있도록 한데 묶은 것이다.

  첫 막 <외투>는 선 굵은 남성적 범죄물이었고 기층민중의 원초적 심리를 그린 당대 베리즈모(사실주의) 경향을 대변했다. 두 번째 막 <수녀 안젤리카>는 여주인공이 희생되는 전통적인 푸치니 극을 대변했다. 세 번째 막 <자니 스키키>는 단테의 『신곡』에서 소재를 가져왔다. ‘전통을 외면한다’는 평론가들의 비난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대중과 평론가들은 <자니 스키키>에만 갈채를 보냈다. 다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투란도트>(1926)는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을 함께 요구하는 비평계 및 기존의 센티멘털한 푸치니 오페라를 요구하는 팬들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목표에서 전작 ‘3부작’과 같았다. 그러나 푸치니는 이 도전에 새로운 응전으로 답하고자 했다. 새 오페라는 헤로인이 둘이었다. 기존 푸치니 극의 팬들을 위해서는 희생하는 여주인공 ‘류’가 필요했다. 새로운 경향을 갈구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바그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전위적인 헤로인을 연상시키는 초월적 여주인공 ‘투란도트’가 등장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신음악’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이고 전위적인 리듬도 1막 칼잡이와 함께 등장하는 발레 장면에서 선을 보였다. 전통을 강조하는 비평가들을 위해서는 이탈리아 전통극 ‘코메디아 델라르테’에서 온 세 캐릭터 핑, 팡, 퐁이 도입됐다. 푸치니에게 운명이 낸 수수께끼는 세 개였다. ‘처음 시도하는 초월적인 여주인공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 ‘비련의 헤로인인 류를 어떻게 투란도트와 대비시켜 공감을 얻을 것인가?’ ‘두 헤로인 중 한쪽을 희생하지 않고 어떻게 한 작품에 조화시킬 것인가?’

  푸치니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대신 하나뿐인 삶을 잃었다. <투란도트>의 마지막 2중창과 피날레는 후배 작곡가인 프랑코 알파노의 손에 의해 완성됐다. 평론가들이 푸치니의 작품에 대부분 이의 없는 찬사를 보낸 것은 첫 작품 <빌리>(1884) 이후 42년 만이었다.

  푸치니의 음악 인생은 위에 상술했듯이 비평가들의 거센 도전에 대한 응전의 삶이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작가주의와 수용자의 대중주의가 가장 건강한 긴장을 이루던 시대의 산물이었고, 그 환경은 최고의 걸작들을 낳았다.

  오늘날 세계 창작음악계를 돌아본다. 지난 세기 초반까지 지속된 고전음악의 경제적 토대는 사라졌다. 그 뒷받침을 이뤘던 상공인 계급 부르주아도 사라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작곡자는 객석을 채우는 청중들이 아니라 국가와 지방정부, 메세나와 학교에 경제적 토대를 의존한다. 기악이나 성악 연주자들의 공연에는 매서운 비평이 쏟아지지만, 각자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 작곡가들에 대해 객석과 비평계는 적당한 갈채로 일관한다. 때로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 연상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우리 시대 음악’의 세계는 과연 건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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