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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과 영화, 침묵 속에서 피어오른 음악 조회수 380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1-12-02 14:00:00
[BALCONY Column] 신예슬의 숨은 현대음악 찾기
④ 아르보 패르트
Club BALCONY 매거진102호 (2021년 10~12월호) 中
글/신예슬
음악 비평가, 헤테로포니 동인.
동시대 음악에 관한 호기심에서 비평적 글쓰기를 시작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음악학을 공부했고, 단행본 『음악의 사물들』을 출간했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은 신비롭다. 일상의 어느 순간에 녹아들어도 이전부터 오랜 시간 곁에 있었던 시간여행자처럼 친근하면서도 묘한 경계선이 그려진다. 그가 쓴 현대음악의 족적을 살펴보면 우리가 그렇게 즐겨 보던 영화 속 구석구석에 이렇게까지 많이 스며들어 있다. 알 수 없는 묘한 끌림이 아르보 패르트의 매력이자 그만의 독특한 색깔일 것이다. 영화 <그래비티>부터 <어바웃 타임> <화씨 911> <데어 윌 비 블러드>를 보며 감정선이 묘한 떨림을 가졌을 때마다 우리는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들었다. 패르트의 음악이 현대음악이라는 선입견에 선을 긋고 구분 짓기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음악이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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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거울_Spiegel im spiegel
기온은 영상 125℃와 영하 100℃를 오르내리고, 매개체가 없어 소리도, 기압도, 산소도 없으며 생명이 살 수 없는 곳.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Gravity)>(2013)는 결코 우주를 낭만화하지 않았다. 우주 쓰레기와 인공위성의 충돌로 인해 생사의 위기에 처한 우주 비행사가 지구로 귀환한다는 플롯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는 우주의 침묵이 가득했다. 가장 강렬한 스펙터클이 펼쳐질 때에도 그곳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겨냥한 것은 그 서늘한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그 광활하고 적막한 우주를 담은 영화가 각인시킨 것은 그곳에서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 그리고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었다. 숱한 SF 영화가 그래왔던 것처럼 우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대신, 영화관을 나와 땅을 밟았을 때의 그 생경한 감각을 한껏 받아들여보게 하는 것. <그래비티> 또한 거대한 우주 픽션이지만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이 영화가 진실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영화가 선사한 감각은 <그래비티>의 트레일러에서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우주에서 위태로이 떠도는 인물과 함께 들려오던 음악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거울 속의 거울(Spiegel im spiegel)>이었다. 몇 개의 음들로 엮어낸 고요하고 나지막한 그 음악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귓가에 들려와 지나치기 쉬웠다. 하지만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볼수록 그 음악은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순하고도 근원적인 힘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울 속의 거울>은 피아노가 여러 음역에서 단정한 3화음의 구성음을 하나씩 연주하는 와중에 영원히 흐를 것 같은 첼로 선율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곡이다. 투명하기 그지없는 이 음악을 담은 영화는 <그래비티>뿐만이 아니었다. 대대로 이어지는 시간여행자 집안의 삶을 다루었던 <어바웃 타임(About Time)>(2013)의 후반부에서도 이 음악이 쓰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로 돌아가 시간을 다시 보낼 수도,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주인공은 결국 지금 주어진 현재에 충실하게 살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찌 보면 당연하기 그지없는 이 작은 진실에 도달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음악이 바로 <거울 속의 거울>이다. 아르보 패르트가 단순한 음들로 만든 정연한 질서는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지만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순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잊고 있던 소중함을 알아차리고 당연한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들에 <거울 속의 거울>이 나오는 것은 이 곡의 작곡 배경과도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청년 시절, 소비에트 연방 체제하에서 그는 버르토크,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음악과 음렬음악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종교적인 주제에 많은 관심을 지녔던 그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당국의 미움을 사면서 음악 활동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 그렇게 오선지 앞에서 몇 년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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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이지만 중세 음악처럼_틴티나불리
말을 잃은 것처럼 고요한 시간을 보내던 그때, 아르보 패르트는 르네상스와 중세 음악, 종교 음악 등을 탐독하며 다른 힘을 조금씩 채워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 하나의 음으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종소리가 만들어내는 한 번의 울림이 몹시 풍요로우면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듯이. 그렇게 아주 작은 요소들만으로 구성된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낸 패르트는 이를 ‘종의 울림’이라는 뜻을 지닌 ‘틴티나불리’(Tintinnabuli)라 별칭하기도 했다.
그런 삶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그의 음악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일까, 그의 음악을 담은 영화들은 우리가 쉬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무언의 상태, 그럼에도 깊은 힘을 내재한 순간들을 직시해야 할 때 쓰였다.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화씨 9/11(Fahrenheit 9/11)>(2004)에서는 테러 장면 이후 패르트의 <벤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가 흘러나왔다. 현악 오케스트라와 튜블라벨 소리는 무언가 끝없이 이어지며 흘러내리는 듯한 감각을 만들었고, 연쇄하는 고운 소리와 울림은 그 참담한 시간을 채웠다.
 

폴 토머스 앤더슨의 역작 <데어 윌 비 블러드(There will be blood)>(2007)에서도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이 등장했다. 주인공 다니엘 플레인뷰는 어린 아들과 함께 석유가 나오는 땅을 찾아 무한히 대륙을 떠돌아다니다, 석유 시추관에서 불이 붙어 아들이 더 이상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마침내 그가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아들과 아버지 모두 확신하는 순간 그 장면에서 패르트의 <Frates>가 들려온다. 미친 듯이 긁어대던 바이올린에 이어 피아노 저음부에서 들려오는 쿵 내려앉는 소리는 그 무언의 서사를 더욱 극대화했다. 패르트의 음악은 말없이 진행되던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 누적된 감정을 낱낱이 드러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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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패르트의 음악
그의 음악은 할리우드의 대규모 영화와 아트하우스 영화를 가리지 않고 많은 영화적 순간에 틈틈이 배어들었다. 하지만 언급한 영화 외에도 너무나 많은 영화가 있는 탓에, 가디언지의 한 기자는 영화인들이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에 너무 의존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며, 패르트의 음악이 지닌 고유한 오라가 사라지기 전에 멈춰보자고 말하기도 했다. 간결하면서도 폭발적이고, 영적이면서도 깊은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드는 그의 음악을 오히려 ‘사용하지 않기’가 더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그의 음악을 담은 수많은 영화 덕에 그의 필모그래피는 충분히 차고 넘치지만, 거꾸로 그의 음악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차츰 쌓여갔다.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에 초점을 맞추어 긴 시간 동안 그와 동행하며 사유를 담아낸 2002년의 <아르보 패르트: 하나의 푸가를 위한 24곡의 프렐류드>를 시작으로, 2015년에는 <아르보 패르트 – 내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와 <실낙원, 아르보 패르트의 초상>이 발표됐다. 그리고 2019년에는 <패르트가 느끼는 것>까지 발표되어 현재 패르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는 총 4편에 이른다. 많은 영화인들이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던 만큼, 그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영화적인 순간을 카메라로 직접 담아내고 싶어 했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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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속, 패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용서하는 것, 위로하는 것, 슬픔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 행복의 눈물의 원천, 해방과 도피입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가시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런 말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잊고 있던 자연스러운 진실을 다시 한 번 밝혀준다. 음악은 인간이 성심껏 살아내는 순간들과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음악과 공명하고 공존함으로써 또 다른 삶의 순간들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마치 영화관을 나와 단단한 땅을 밟고 그 힘의 존재에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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