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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COVERSTORY]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정명훈 조회수 149
작성자 클럽발코니 작성일 2021-04-10 13:06:00
[COVERSTORY]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정명훈
-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 피아노의 거장들
Club BALCONY 매거진100호 (2021년 4~6월호) 中
글/김주영 피아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유니버설 뮤직
 
정명훈이 지휘봉을 내려놓고 건반 앞에 앉았다. 새로운 음반 발매와 함께 리사이틀을 준비하고 있는데, ‘리사이틀’이라는 말에서 예상하다시피 지휘자로서가 아니라 피아니스트로서 음악회를 준비하는 것이다. 음악가 정명훈은 지휘자일 때도 좋겠지만, 피아노를 사랑하는 팬들은 ‘피아니스트 정명훈’의 무대를 늘 기다리고 기대해왔다. 도이치 그라모폰을 통해 하이든, 베토벤, 브람스 말년의 작품들을 모아 앨범을 발매하고, 이 프로그램으로 4월 28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정명훈’의 리사이틀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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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의 의미는 조금씩 퇴색하더라도 없어지면 정말 아쉬운 것들 중 하나가, 오랜만에 만난 집안의 어른들이 손주들을 위해 해주는 덕담이나 옛날이야기다. 어른들은 언제 자랐는지 모르게 훌쩍 키가 큰 아이들을 보고 장래 희망을 물어보기 마련인데, 만약 그 아이가 음악가가 되겠다는 말을 한다면 으레 반응은 이렇다. “그래, 반드시 정명훈같이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
어른들의 격려나 응원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음악을 평생 업으로 삼아야 할 운명임을 깨달은 소년들에게 정명훈이라는 이름은 장래 희망이 대통령인 친구들 이상으로 심각하고 진지한 목표였다. 단 세대에 따라 그 방향은 조금 달랐는데, 최소한 내 또래의 친구들에게 정명훈은 ‘피아니스트’로서 반드시 다다르고 싶은 꿈이었다.
대한민국 클래식계의 작은 손실이 있다면 그것은 정명훈이 지휘계의 마에스트로로 자리 잡으면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가지 않게 된 것이라고 틈만 나면 얘기해왔다. 아울러 그가 피아노 앞에 앉을 공연이 열린다면 절대 놓치지 말라는 조언도 자주 한다. 나조차도 여러 번 놓쳤던 그의 실내악과 반주 무대 등에서의 피아니스트로서의 활약은 단순히 희소가치만 있는 연주가 아니라 그 높은 완성도로도 지나치기 아까운 이벤트였던 것이 분명하다.
 


정명훈의 피아노에 대한 간절함을 오래 간직해온 팬들에게 ‘피아노’라는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타이틀로 발표한 ECM 레이블의 2014년 앨범은 그간의 기다림을 기분 좋게 보상해준 소식이었다. 자신의 손주들에게 들려주고자 녹음했다는 소감을 담았지만 소품들 속에 담긴 음악적 긴장감과 톤에 대한 집중력, 가벼우면서도 사려 깊게 조절된 기교적 면모 등은 자애롭고 따뜻한 할아버지의 손길 그 이상을 담은 명품이었다. 달콤하게 녹아들면서도 단단한 중심이 느껴지는 음상으로 맛깔나게 요리한 드뷔시의 ‘달빛’과 쇼팽의 녹턴 두 곡은 피아노 음색에 대한 그의 감각이 시들기는커녕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아라베스크’는 지휘자가 아닌 연주자로서 아직도 청중들에게 건네고자 하는 이야기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준 흥미로운 해석이었다.
슈베르트의 즉흥곡 E♭장조와 G♭장조는 굳이 독일식 아카데미즘에 기대지 않아도 청중들에게 시적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마지막에 실린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은 60대의 연주자라는 것을 잊게 하는 깔끔하고 매끈한 비르투오시티를 적절히 나타낸 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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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히고 숙성시켜 내놓은 작곡가 말년의 소품집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에서 발매하게 된 이번의 독집 신보는 갑작스럽기에 더욱 반갑다. 이전의 앨범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고전과 낭만의 마스터피스들을 골고루 담아 팬들의 기대가 더욱 크다. 언뜻 보아서는 여느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작품을 담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작곡가의 개인적 상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영감 등을 다채롭게 고려해 배열해놓은 사려 깊은 프로그램이다. 지휘는 물론이고 피아노 연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풀어놓는 일이 극히 드물었던 정명훈이기에, 새 앨범 라이너 노트에 쓰인 짧은 글은 그의 해석을 짐작하기에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앨범에 수록된 세 작품을 선정한 바탕에는 음악을 통해
삶의 여러 단면을 표현하고 싶다는 개인적 열망이 있습니다.
세 작품 모두 작곡가의 일생 말년에 완성된 곡입니다.”


하이든과 베토벤의 소나타, 브람스 말년의 피아노 소품집은 한 작곡가의 삶 전체를 짧고 굵게 고찰하고 경험하는 데 참으로 적절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평생을 음악에 바친 그들의 소중한 발자국이 고스란히 찍혀 있음도 분명하다.

“유년에 접한 음악과 말년에 접한 음악은,
특히 위대한 작곡가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은 완전히 다른 경험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음악들은 삶의 다양한 단계를 거치는 동안 육체의 아름다움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이동합니다.”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오래 두고 바라봐온 그들의 진실이 들어 있는 세 작곡가의 작품들은 60대 후반에 들어선 피아니스트의 넉넉한 관조와 더불어 완벽에 가까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듯하다. 이번 내한 공연 프로그램 역시 앨범의 수록곡을 중심으로 브람스의 소품집 한 세트가 더해져 청중들의 주목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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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같고 사랑이 충만한
요제프 하이든이 영혼에 서린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장소가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영국이었다는 사실은 강한 음악사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말년의 위대한 교향곡들이 만들어진 시기였던 1794년에 창작된 소나타 세 곡 중 첫 작품인 C장조 Hob.50. 이 곡은 개성 있는 모티프와 그 사용법, 창의적인 페달링 등에서 위대한 후배 베토벤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실험적인 동시에 음표 하나하나마다 하이든 특유의 유머 감각이 살아 있는 걸작인 이 소나타는 무대에서 연주자가 나타내는 즉흥적 표현이 그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신비로움을 안고 있기도 하다.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중 가장 낙천적이고 삶을 포용하는 넉넉함이 느껴지는 30번 E장조 작품109는 간결하지만 분명한 특징을 지닌 세 악장이 교묘하게 연결돼 있는 형태다. 상반된 두 가지 음악적 요소가 번갈아 나타나는 1악장은 정제된 소나타 형식이며, 프레스티시모의 2악장은 스케르초인 동시에 간주곡이다.
주제와 변주로 이루어진 마지막 악장은 소나타 전체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론이며, 베토벤이 말년에 와서야 시도한 ‘피날레로서의 변주곡’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함축적인 음악 언어로 만들어진 초월의 경지는 언제 들어도 인상적이다.
간결한 표현과 원숙한 음악적 내용이 공존하는 가장 이상적인 예는 브람스의 후기 피아노곡들에서 찾을 수 있다. 카프리치오, 간주곡, 광시곡, 로망스 등 다양한 이름으로 흩어져 있는 이 걸작들이 그리는 말년의 브람스는 회한과 체념, 달관의 모습이자 완성된 로맨티시즘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에서 특별히 연주되는 세 개의 간주곡 117은 쓸쓸함이 감도는 선율미와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한 악상 배열이 눈길을 끄는 걸작들이다. 스코틀랜드 자장가 선율을 기초로 한 1곡은 따뜻하며, 우수에 찬 아르페지오가 인상적인 2곡은 작곡가의 슬픔을 차분하게 다스린다. 민요풍의 가락이 지배하는 3곡은 ‘비탄에 잠긴 자장가’가 전달하는 매력이 넘친다.
작품119의 네 곡은 1893년 완성되었으며, 초연은 클라라 슈만의 제자인 일로나 아이벤슈츠에 의해 이뤄졌으나 어디까지나 클라라를 위한 작품이다. 쌉싸름한 뒷맛이 느껴지는 불협화음이 깊은 정감을 더하는 1곡, 자유로운 변주곡 형식으로 마음의 흔들림을 전하는 2곡, 기품 있는 율동감으로 브람스적인 정서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3곡은 모두 간주곡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며 마지막 4곡은 광시곡이다.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진 피날레는 웅장하고 단호한 느낌과 절제된 오케스트레이션이 느껴지며, 전곡에 걸친 당당함은 노년에도 잃지 않았던 브람스의 호방함을 나타내고 있다.

“음악이라는 가장 진실한 언어 안에서,
지금 내가 서 있는 인생의 단계는 영혼의 세계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깝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마법 같고 그 어느 때보다 사랑이 충만합니다.”

음악과 더불어 삶의 조각들을 멋지게 맞추고 가꿔온 행복한 음악가 정명훈의 결정적 순간이 어떤 모습일지, 그의 팬들은 머지않아 그 진실한 모습과 마주하리라 생각한다(정명훈 피아노 리사이틀. 4월 23일 대구 콘서트하우스, 24일 군포문화예술회관, 27일 경기아트센터, 28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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